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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 번, 미소 한 잔, 고백 한 모금
By. 임징징이
“만나서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시간 괜찮아요?”
평범한 안부 전화였다. 그것도 '전화를 잘못 눌렀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연결된 우연한 전화. 실수치고는 오래 대화가 이어진 건 그들이 매일같이 시시콜콜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연락을 이어나가는 친밀한 사이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단 아마 츠키시마가 이 순간을 꽤 기다려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마 그가 먼저 전화를 걸지 않았어도 조만간 메시지로 만남을 제안했을 거다. 단 며칠 그 시기가 빠르게 찾아왔을 뿐이다.
쿠로오는 흔쾌히 만남을 승낙했다.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말에 무엇에 관한 상담인지는 묻지도 않는다. 그저 상담을 요청할 정도로 본인에게 의지하게 되었다니 뿌듯하다며 쓸데없는 말 몇 마디를 덧붙인다.
무엇이든, 언제든 고민이 있다면 지금처럼 도움을 청해도 좋다는 그 나름의 배려 섞인 메시지임을 츠키시마는 잘 알고 있다. 그 역시도 츠키시마가 제 의도를 이해했다는 걸 알고 있을 테지. 에두르는 대화 속엔 배려가 조금씩 녹아 있다. 이것을 알게 된 지는 사실 그리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츳키 성인이잖아. 술 마실 수 있지?”
“‘그러고 보니’라니 방금 알았다는 듯이 말하지 말아요.”
“너 졸업하고 나서는 만나질 못했으니까. 같이 마시러 가자. 조용하고 괜찮은 곳을 알아.”
“저 잘 못 마셔요. 형이 가르쳐준다고 했었는데, 영 입에 안 맞아서.”
“칵테일바니까 마시기 편한 것도 많아. 술 가르쳐주는 영광을 내가 누리겠네, 감사하게도.”
약속은 다행히 쉬이 잡혔다. 아무리 서로가 친밀하고, 만남을 원한다 할지라도 날짜와 시간이 곧바로 정해지지 않으면 만남은 자꾸만 미루어질 것이 뻔했다. 그렇게 잊히고, 멀어지겠지. 도쿄와 미야기는 그런 거리다. 노력 없이는 인연을 이어나갈 수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잠시 기대했던 때도 있지만, 츠키시마는 미련 넘치는 인연의 뒤를 쫓는 대신 나아가야 할 길을 택했고, 그래서 미야기에 남았다.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후회는 되지 않았다.
후회는 되지 않는데, 사실 아쉬웠다. 많이. 우리가 실은 같은 곳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 번쯤은 생각해볼 정도로는. 최소한,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핑곗거리를 생각하지 않아도 만날 수 있을 정도로만.
통화를 마치고, 츠키시마는 옅게 열이 오른 핸드폰을 한참 바라보았다. 뺨은 같은 온도로 달아올라 있었다.
* * *
“고급 바는 아니지만 이만하면 분위기 괜찮지?”
“그렇네요.”
“비싼 곳을 데려가기엔 나도 아직 대학생이라 지갑이 넉넉하질 않아서 말이야. 이해해줘.”
“바라지도 않거든요? 여기 마음에 들어요. 조용하고.”
“그렇지? 칵테일도 잘 만들어.”
“그쪽은 잘 모르지만요.”
웃으며 자리에 앉는 쿠로오를 따라 바에 자리를 잡는다. 이런 곳이 익숙해 보이는 쿠로오와 달리 츠키시마는 모든 것이 어색하기만 하다. 어두운 바의 분위기도, 눈인사하며 물수건을 건네는 바텐더도, 어두운 조명 아래에 저를 보며 미소짓는 쿠로오도. 그러나 츠키시마는 애써 대수롭지 않은 척 시치미를 떼며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수건은 따뜻했다.
다만 메뉴판 위를 맴도는 눈은 한참이 지나도록 무엇 하나를 골라내지 못했다. 그야 이제 막 성인이 된 츠키시마는 이런 곳이 생전 처음이었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그야 미야기에도 바는 많고 개중엔 분위기 있는 곳도 꽤 있을 테지만, 가보질 않았으니 익숙할 리가 없다.
“너 단 거 좋아하던가?”
“조금.”
“처음엔 간단한 거로 가자고. 나도 굳이 원하지도 않는 걸 억지로 밀어붙이는 성격은 아니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해도 잘 모르겠는걸요.”
“그럼 일단 내 추천을 믿어보세요. 부드러운 쪽이 좋겠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쿠로오는 만족스러운 듯, 바텐더에게 손짓하며 무어라 이야기한다. 바텐더는 쿠로오의 주문을 듣고 의아해하더니, 츠키시마를 흘끔 바라보며 웃는다. 웃음이 묘하게 기분이 나빠 츠키시마는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어어? 얘 기분 건드리지 말아요. 얘가 마음에 안 들면 저도 바로 나갈 생각이니까.”
“아, 기분 나쁘게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죄송해요. 키가 훤칠해서 어리신 분인 줄을 몰랐네.”
“네에…….”
바텐더는 머쓱하게 웃어 보이며 자리를 피하자마자 츠키시마는 쿠로오의 어깨를 붙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저 사람, 바보 취급한 거죠, 지금?”
“아냐, 아냐.”
“맞는 것 같던데. 딱 웃는 게.”
“뭐어……. 저 사람이 가-끔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는 게 문제긴 한데……. 그래도 알아들었을 거야.”
“다짜고짜 어리다고 하질 않나…….”
“내가 시킨 게 도수가 좀 약하거든. 네가 위스키라도 마실 것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나 보지.”
“마음에 안 들어……. 애초에 술에 괜한 자존심 부리는 사람 별로예요.”
“통했네. 나도야.”
쿠로오가 다시 웃었다. 이번 웃음은 봐달라는 듯 약간의 난감함을 담고 있다. 츠키시마도 물론 여기까지 와서 상관도 없는 일로 날을 세울 생각은 없다.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렇게 잠시 아무 말 없이 제 앞에 놓인 코스터만 톡톡 건드리다 보니, 얼마 되지 않아 술이 나왔다.
두 잔의 술. 투명한 글라스에 담긴 반투명한 술은 쿠로오의 앞에, 조금 더 큰 잔에 새하얀 우유가 가득 담긴 술은 츠키시마의 앞에 놓인다.
“이거면 마실 수 있을걸?”
“저도 이건 알아요. 깔루아 밀크죠?”
“아, 마셔봤어?”
“아뇨……. 바는 아예 처음이에요.”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거로 시켜줄게. 이건 내가 마시고.”
“그게 아니라…….”
눈썹을 이리저리 휘며 난감해하던 츠키시마가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숨길 이야기도 아니다.
“신입생 환영회에 딱 그런 선배가 있었거든요.”
“그런? 아아. 술 부심 부리는 사람? 꼭 한 명씩은 있더라.”
“네에. 깔루아 밀크니, 피치 크러쉬니 애들이나 마시는 거라고 하도 바보 취급을 하길래 이름은 알아요.”
“어리네, 어려. 그래서 안 마실 거야?”
“마실 거예요. 그냥 그 선배 생각이 나서 기분이 좀 별로였을 뿐이지.”
“이 선배는 이런 거로 바보 취급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츠키시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자 쿠로오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웃는다.
“그리고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얘기하지 마. 나한테 집중하라고.”
“…저니까 봐주는 거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 하면 뺨 맞을 거예요.”
“하하. 참고할게.”
얄궂게 눈을 흘겨준 뒤, 잔에 입술을 갖다 댔다. 부드럽고 달콤한 우유와 커피 향. 츠키시마가 영 적응하지 못했던 알코올 냄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목 넘김이 좋아 쉬이 한 모금을 크게 넘길 수 있었다.
“괜찮지?”
“응. 맛있어요.”
“봐. 내가 네 취향을 꽤 잘 안다고.”
“뭘 자신만만해 하는 거예요?”
자연스레 말문이 트인다. 쿠로오와 츠키시마는 꽤 오래 서로가 몰랐던 안부를 물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학에 관한 것. 시험이나 새롭게 만난 사람에 관한 것. 요즘 빠져 있는 것. 새롭게 알게 된 취향. 그리고 배구에 관한 것.
다만, 원래 그를 만나려 했던 이유는 입술 언저리를 맴돈 채 끝내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츠키시마가 하고 싶은 말의 언저리만 빙글빙글 맴돌고 있다는 것을 분명 한참 전에 눈치챘을 텐데도 쿠로오는 조금도 츠키시마를 보채지 않았다. 그저 따뜻한 시선만을 보내온다.
언제든 편할 때 말해도 돼. 꼭 지금이 아니라도, 오늘이 아니라도 좋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아서, 츠키시마는 그 눈을 오래 응시했다. 그에게 듣고 싶었던 대답을 그의 말이 아니라 눈빛에서 찾아간다. 츠키시마는 아주 오랫동안 홀로 고민해왔던 것들을 하나하나 마음속에서 갈무리해나갔다. 진로에 관한 것. 그리고 그에 관한 것.
* * *
만나서 밥을 먹고, 근처를 구경하고, 음료수 하나를 손에 들고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해는 금방 저문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조금씩 몰려오기 시작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마지막 행선지를 고민할 때까지도 츠키시마는 고민을 털어놓지 않았고, 쿠로오 역시 재촉하지 않았다.
“오늘 감사했어요.”
“한 것도 없는걸.”
“시간 내주셨잖아요.”
“츳키 부탁인데 언제든지 내줄 수 있지.”
“매번 말이야 그렇게 하시지만…….”
“진짜야.”
앞서 걷던 쿠로오가 츠키시마를 돌아본다. 츠키시마가 묵기 위해 예약해둔 호텔로 가는 길. 어둠이 내려앉고 가로등의 불빛이 은은하게 퍼져 주변을 노랗게 물들이는 골목에서. 그의 밝은 눈동자는 가로등의 따스한 불빛을 똑 닮아 있어서, 츠키시마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한다. 따뜻하고, 어딘가 낯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시선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츠키시마는 쿠로오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그는 아주 조용히, 느리게 입을 열었다.
“네 부탁이면 시간 같은 건 언제든 낼 수 있어.”
허튼소리 하지 말아요. 평소의 츠키시마라면 그렇게 말하며 투정을 부리듯 고개를 돌려버렸겠지만, 어째선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놀란 듯 커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옷 속을 파고든다. 항상 9월 이맘쯤이면 해가 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가을을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추위에 약한 츠키시마가 살짝 몸을 떨자 쿠로오가 다가와 겉옷을 여며준다.
“그래서 뜸 들이기 달인인 츠키시마 씨? 고민을 털어놓을 생각은 좀 들었나요?”
“아아…….”
“말하기 힘든 이야기인가 해서 먼저 물어보진 않았지만, 역시 여기까지 올 정도니까 걱정은 돼서 말이야.”
“말하기 힘든 건 아니에요. 그냥…….”
츠키시마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제 미소가 쿠로오의 것과 조금은 닮은, 여유 있고 부드러운 웃음이었길 바라며.
“해결된 것 같아서요. 덕분에 결심이 섰어요. 감사해요.”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당신을 보니까 그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츠키시마는 걸음을 옮겼다. 멈춰서 자신을 바라보는 쿠로오를 지나 저를 따라 걷기 시작한 그보다 조금 앞서 걷는다. 벅참과 설렘, 기대감과 아쉬움,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제 얼굴이 보이지 않길 바랐다. 쿠로오는 다행히 츠키시마와 두 발자국 떨어진 거리를 유지한 채 거리를 좁혀 오지는 않았다.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배구.”
“아…….”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어요. 2군 팀이긴 하지만, 어쨌든 정식 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되는 셈이죠.”
“대단하네. 축하할 일이야.”
“사실 배구 선수를 직업으로 가질 생각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따로 있어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잠시 뜸을 들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과 상의는 해보고 정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한테 배구를 알려준 사람이 당신이니까.”
“네 형이 아니라?”
“그건 맞지만…….”
“하하. 무슨 말인지 알아. 기특한 ‘부 활동 씨’. 머리 쓰다듬어도 돼?”
“안 돼요.”
굳이 낯부끄러운 말을 하지 않아도 제 마음을 헤아려주는 그가 좋다. 츠키시마는 차마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2음절의 그 단어를 입술 안에서 곱씹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배구를 계속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쩌다 이런 고민까지 하게 됐는지. 조금 원망스럽기까지 한 이 상황의 원흉을 츠키시마는 좋아하고 있다. 꽤 오랫동안. 제 입으로 배구가 재미있다고 말하게 된 바로 그 순간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스카우트 제의. 형도, 야마구치도 주변도 저보다 더 기뻐하며 축하해주었지만, 츠키시마는 섣불리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실은 곧장 거절하려고 했었다. 배구는 재미있지만, 여전히 부활동 이상으로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정말 가고 싶은 길은 따로 있었으니까. 무엇 하나에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다면 저 스스로에게 환멸이 날 것 같았다. 조언이 필요했다. 이왕이면 그에게서. 덕분에 이런 고민까지 하게 될 날이 오고야 말았으니.
“당신을 보니까 역시 계속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어요.”
“…그렇게 결정한 이유라도 있어?”
“글쎄요. 사실 진짜로 원했던 건 이런 거였는데, 확신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죠.”
아무리 멈추고 아무리 느리게 걷고 아무리 돌아가도 결국 발걸음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둘은 어느새 츠키시마가 내일 아침까지 머물 비즈니스 호텔 앞에 도착했다. 쿠로오가 제 집에서 자고 가라며 넌지시 제안했었지만, 츠키시마는 굳이 그 제안을 거절하고 차곡차곡 돈을 모아 숙소를 예약했다. 짝사랑하는 사람의 집에서 함께 잔다니 말도 안 된다. 그에게는 이왕 온 김에 호텔에서 자보고 싶다며 대강 얼버무렸었지만…….
“당신을 보니까 확신이 들었어요. 이 사람한테 날 책임을 지게 하기 위해서라도 계속해야겠다고.”
허공을 바라보며 다짐하듯 결심을 고백한다.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지만, 밤공기 사이로 옅게 퍼지는 웃음소리 덕분에 쿠로오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음의 안정을 주는 웃음소리.
이젠 제법 익숙해졌을 웃음인데도 느껴지는 분위기는 처음 그를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여유와 안정. 여전한 배려와 장난스러움. 그럼에도 함께 머물러 있는 진중함.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 새롭게 깃든 성숙함 덕분일 거다. 그는 늘 성숙했으니까, 어쩌면 츠키시마가 이제사 스스로를 어렴풋이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리까지 왔기 때문에 새삼 느끼게 된 건지도 모르지만.
“나도. 감사한 일이네.”
“뭐가요?”
“불안해하던 게 있었거든, 나도. 덕분에 날아갔어. 고마워.”
“……?”
“나도 슬슬 진로를 고민해야 할 때잖아. 하고 싶은 일은 있는데 좀 뭐랄까……. 자신이 없었거든.”
“자신 없는 당신이라니 의외네요.”
“내가 보쿠토랑 친하긴 해도 그 녀석이랑은 다르거든? 소심한 구석이 있다고. 여린 남자야.”
“예에, 예.”
둘은 자연스레 호텔 주변을 빙 돌다가 호텔 뒤편의 작은 정원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있는 듯 울타리에 몸을 나란히 기대어 섰으면서도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몇 번이고 찾아온 정적. 어색함 같은 건 없지만, 정적 뒤에 이어질 말이 ‘그럼 다음에 또 보자’ 따위의 말일까 봐 츠키시마는 내심 불안해한다. 그래서 가을밤의 찬바람에 몸이 차게 식는데도 내색하지 않았다.
“나도 배구는 계속할 생각이야. 뭐어……. 너처럼 팀에 입단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럼?”
“돌보는 일을 할까 해. 아무래도 그쪽이 나한텐 더 적성에 맞더라고.”
“돌보는 일이라면, 코치를 말하는 거예요?”
“그쪽은 아무래도 무리고……. 뭐어. 되면 말해줄게. 어렵거든.”
“돌보는 쪽이라면 어쨌든 잘할 거예요. 어울려요. 예전엔 당신은 유아교육과를 가도 잘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건 너무 간 거 아냐?”
소소하게 웃음이 끊이지 않는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지만, 추위에 약한 몸이 영 따라주질 않는다.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오늘은 어제보다도 기온이 낮다. 괜찮으냐고, 쿠로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츠키시마를 바라보며 묻는다.
“추워?”
“…조금.”
“…슬슬 들어가자. 원래 이맘쯤이 긴장 풀면 바로 감기 걸리기 딱 좋을 때니까…….”
“음…….”
“츳키?”
“…사실 하고 싶은 말이 남았어요. 고민하고 있던 게 하나 더 있기도 하고…….”
충동적으로 그를 붙잡았다. 쿠로오가 저를 돌아본다. 츠키시마는 그에게 절대 꺼낼 생각이 없던 말이 자꾸만 입술 언저리에 맴도는 것에 적잖이 당황했다. 말하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입은 이미 달싹거리며 다음 말을 준비하고 있다. 오늘 품은 또 하나의 결심을 츠키시마는 쿠로오에게 고백하려 하고 있었다. 내심 최악의 상황까진 오지 않으리라 믿어가며.
“저 사실 당신한테 편견이 좀 있거든요.”
“오호라. 그거 참 흥미롭네. 들어보자, 어디.”
“당신은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도 별 편견이 없을 거란 편견이 일단 하나 있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뱉으며 슬쩍 그의 눈치를 본다. 쿠로오는 어깨를 으쓱하며 츠키시마가 상상했던 바로 그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츠키시마를 바라보았다. 내심 안도하게 된다.
“뭐어……. 편견 가질만한 일도 아니잖아.”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이건 좋은 편견이네. 일단 하나면 다른 편견은?”
“음…….”
이걸 말할까 말까. 고민이야 좀 되지만 어차피 이미 입을 열었으니 물러설 곳도 없다. 츠키시마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쿠로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쿠로오의 눈이 가늘어진다. 어서 말해보라는 듯.
“그 좋아하는 남자가 당신이라고 해도 아마 당신은 절 혐오하진 않을 거라는 거. 심정이야 복잡해질지는 몰라도.”
“…….”
“그래서 그냥 말하려고요. 당신 기분이야 뭐, 내 알 바 아니고.”
“…츳키.”
“그냥 아무 말 하지 말고 들어줘요. 조금만 이기적으로 굴게요. …후배의 응석 정도로 생각해줘.”
“…응.”
오늘의 두 번째 결심을 말할 차례다. 츠키시마는 오늘 굳이 도쿄까지 올라와 숙소씩이나 잡아가며 그를 만나러 온 이유에 대해 더는 변명하지 않기로 했다. 진로에 관한 답도 물론 얻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그의 얼굴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그 이유가 더 컸다는 걸 저 스스로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망 없는 일은 금세 포기하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질러버리고 그가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타 홀연히 사라질 생각이다. 쿠로오는 아마 츠키시마가 남자를 좋아하건, 여자를 좋아하건, 둘 다 좋아하건,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건 그 어떤 색안경도 끼지 않을 남자였지만, 고백을 거절한 이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낼 위인은 되지 못할 거다.
그는 둘째치고, 일단 츠키시마가 거절당한 이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츠키시마는 오늘을 기점으로 그와 더는 연락을 하지 않기로 제 나름의 결심을 마쳤다. 오늘의 두 번째 결심이다. 그러다 보면 서서히 잊히리라 생각하며.
그렇게 잊히고, 멀어진다. 도쿄와 미야기는 그런 거리다. 노력 없이는 인연을 이어나갈 수 없는 데다, 노력만으로 이어지는 인연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느니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믿었다. 그러나 츠키시마가 이곳에 와서 내린 결론은 지금껏 멋대로 갈무리하던 마음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츠키시마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쿠로오를 마주 보았다. 그의 눈을 보니 망설임 같은 건 아침 안개가 햇살을 받고 사라지듯 천천히 걷힌다.
“저 당신을 좋아해요. 아마 꽤 오래전부터인데……. 사실 말할 생각 없었지만, 어차피 포기할 거 그냥 질러보려고요.”
“…츳…….”
“그냥 들어만 주세요. 더 귀찮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다급히 쿠로오의 말을 잘라낸다. 츠키시마는 쿠로오의 대답은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제 말을 쏟아낸 채 숙소로 들어가 버릴 생각이다. 그에게 부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응석. 이기심. 그에게 직접 거절당할 용기는 없으니, 츠키시마 스스로 그의 대답을 거절한다.
“받아주지 않더라도 말은 하고 싶었어요. 당신이 너무 눈치 없이 굴길래 한번 큰코다쳐 보라는 기분으로……. 억지로 받아달라는 건 아니고요.”
“…나 이제 말해도 돼?”
“아뇨. 안 들을 건데요.”
“그럼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
“그러니까 이기적으로 굴 거라고 했잖아요.”
다행이다. 심장이 너무 뛰어 목소리가 떨리거나 바보처럼 울음이 터지는 일 같은 건 없었다. 대답을 듣지 않기로 한 건 잘한 결정이다. 이대로 숙소에 들어가 침대에 홀로 몸을 묻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자신이 있었다. 조금 허전하긴 하려나?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 어차피 그를 생각할 때마다 늘 느꼈던 거니까.
“저는… 아마 당신도, 이런 말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자신 없는 사람들인 거 아니까, 이만 들어갈게요. 아마 연락도 안 할 거예요, 이제.”
“…….”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늘 감사했어요.”
츠키시마는 매우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뒤를 돌았다. 무엇이건 애매한 건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놓는 편이 좋다. 걸음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그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호텔 입구를 향한다. 그러나 몇 발자국 걷지도 못한 채 그의 목소리에 붙들려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왜 멋대로 단정 지어?”
“당신만 절 잘 아는 건 아니니까요.”
“아니. 넌 하나도 몰라.”
화가 난 것 같은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가로막힌다. 가을바람의 서늘함이 아니라 따뜻한 체온이 온몸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뒤에야 츠키시마는 쿠로오가 뒤에서 저를 끌어안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내가 널 받아줄 거란 가정은 안 했어?”
“안 했어요. 취한 사람 동정받는 거 딱 질색이야.”
“지금 말 한 글자도 안 맞고 다 틀렸어. 난 취하지도 않았고 동정하는 것도 아니거든?”
“…….”
“그냥 난 널 좋아해. 전부터 계속.”
“…….”
“먼저 말하게 해서 미안해.”
“내가 말하지 않았으면 먼저 말하기라도 했을 것처럼.”
“그러려고 했는데…….”
“했는데?”
“…말했잖아. 소심한 구석이 있다고.”
츠키시마의 몸을 움켜쥐듯 힘주어 끌어안고 있던 쿠로오의 팔에 조금 힘이 풀린다. 기가 찬다는 듯 혀를 차던 츠키시마가 고개를 돌렸다. 단호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뺨과 눈가가 조금 붉어져 있어 바보 같기도 하다. 그러나 지적하기엔 츠키시마 역시 비슷한 처지일 것이 분명하므로, 그만두기로 했다.
왜요? 언제부터였죠? 고백하려고 했다면 그건 언제였죠? 난 오늘 이후로 당신과 연락을 끊을 생각이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했죠?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나요? 안다면 언제부터? 어떤 순간에?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는데, 그 어떤 것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다.
가을바람의 쌀쌀함은 이제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남들보다 유독 추위에 약한 츠키시마인데도 그랬다. 이따금 어렵게 내린 결심은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다. 지금도 결국 그런 것뿐이라고, 츠키시마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킨다. 다가오는 그의 얼굴과 뺨을 감싸오는 손에 가만히 눈을 감으며.
“키스해도 돼?”
이미 입술 끝이 조금 닿지 않았나? 입술만 벌리면 그의 숨결이 곧장 입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지척에 다가와 놓고도 그는 츠키시마에게 나지막하게 허락을 구한다. 허락의 말이 뱉어내는 호흡은 유난히 간지럽다.
“…해주세요.”
부드럽게 입술이 포개진다. 츠키시마의 입은 달았고, 쿠로오의 입은 조금 썼다. 츠키시마에겐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어른의 향기. 그것만으로도 취할 것 같아 츠키시마는 조심스레 쿠로오의 어깨를 끌어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