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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se

“그러고 보니, 오늘 생일이었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말을 꺼낸다. 츠키시마의 얼굴이 왜 그걸 알고 있냐고 묻는 것 같았다. 턱 근처에 손을 대고는 심각한 표정을 하다가 나를 빤히 보고서는 입을 열었다. 생일 이야길 꺼낸 적이 있냐는 질문에 저번에 알려줬다는 대답을 했다. 여전히 자신의 기억에는 없는 일이었는지 눈썹까지 찡그려가며 생각하다 이내 포기하고는, 들고 있던 딸기 스무디 한 모금을 빨아올렸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생일에 관해서는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떨어진 츠키시마의 지갑을 주워주면서 본 학생증의 생년월일을, 자신이 몰래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9월 27일. 8월도 10월도 아닌 9월인데다 27일에 태어나다니, 그마저도 츠키시마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생일파티 하겠네?”

 

더군다나 스무 번째 생일이니 약속이 없을 리가 없었다. 낯을 가리긴 하지만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자기 입으로 말하는 일은 별로 없지만, 지나가는 말로 꺼낸 고백받은 횟수만 해도 한 손가락을 넘어갔다. 그 나름대로 주위에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대학생에게 누군가의 생일은 사람들을 모아서 놀기에 딱 좋은 명분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었다. 자신과 츠키시마가 꽤 오랫동안 알아 온 사이라 해도, 대학도 학년도 다르다. 행동반경이 겹치지 않으니 만나려면 시간을 내야하고, 의지가 필요하다.

 

운이 좋았다. 심심하면 공원이나 가자는 자신의 연락에 츠키시마는 평소보다 빨리 답장을 했다. 그래서 지금, 쾌청한 하늘 아래 따가운 가을의 햇빛을 받으며 팔자 좋게 공원이 벤치에 나란히 앉아 테이크아웃 해온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트렌치코트 차림이었다. 계절에도, 본인에게도 지나치게 잘 어울려서 지나가던 몇몇 사람은 대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기분이 묘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 아뇨.”

“안 해? 왜? 다들 바쁘대?”

“제가 거절했어요.”

“왜?!”

 

놀란 탓에 커진 자신의 목소리에 츠키시마도 덩달아 놀랐는지 움찔거렸다. 이유를 묻자 양손을 깍지끼고 음- 하고 뜸을 들이다가 조약돌 늘어놓는 것처럼 줄줄 이어 말했다. 별일 없이 산다면 일 년에 한 번씩은 맞이하는 날인데 스무 번째만 요란 떠는 것도 이상하고, 생일을 핑계로 시끄럽게 술만 마시는 것도 싫고, 혼자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느긋하게 보내고 싶었으니까요. 당사자가 아쉬워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으니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상식선에서는 혼자 생일을 보낸다는 사실이 괜히 아쉬워졌다.

 

계획을 변경하기로 했다.

 

“밥 먹자.”

“에- 집에 갈 건데요.”

“내가 살게.”

“그럼 가야죠.”

 

사준다는 말에 냉큼 말을 바꾸는 게 얄밉지만 귀여웠다. 츠키시마가 집 근처가 아닌 도쿄로 진학했다는 소식을 듣고 만난 게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대학생이 된 걸 축하한다고 하기에는 꽤 시간이 지난 시기였다. 대학교 1학년의 반절이 지나간 시점이었다. 자신의 진학과 이런저런 일로 그간 연락을 하지 못했으니, 정말 오랜만에 만난 셈이었다. 어색함과 서먹함에 숨 막혔던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럭저럭 같이 논 지 1년 가까이 되었고-꽤 많은 일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단둘이 수족관을 갔고, 막차를 놓쳐 집까지 걸어가 보기도 했고, SNS에서 유행하는 카페에 줄까지 서가며 디저트를 먹는 등등), 적어도 자신은 친해졌다고 느꼈고 츠키시마도 그런 것 같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얻어먹는 걸 눈에 띄게 불편해했었다. 아직도 세 번에 한번은 거절하지만, 그때와 비교하면 눈부신 발전이었다. 호의를 빚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츠키시마에게는 좋은 변화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끼니를 해결하기 딱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일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다행이었다. 자신의 호의가 거절당하지 않는 것도 좋았다.

 

 

* * *

 

 

혼자 조용히 생일을 보내고 싶다고 말한 주제에, 생일인데 고작 패밀리 레스토랑이냐며 쩨쩨하다는 츠키시마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거기까지 말해놓고는 얻어먹는 주제에 말이 많았다며 정중히 고개를 숙여 사과 아닌 사과까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 걸 전부 지켜보고는 조용히 메뉴판을 내밀었다. 진지하게 뭘 먹을지 고민하는 츠키시마를 앞에 두고 선물을 건넬 타이밍을 가늠했다. 원래는 공원에서 준비한 선물을 주고 헤어질 생각이었다. 자신은 오늘이 츠키시마의 생일인 걸 우연히 떠올렸다는 설정이니, 정확히 말하면 선물이라기보다는 네가 괜찮으면 받아달라는 의미로 건네는 물건이었다. 그렇게 연출 된, 흔한 리본조차 없고 포장도 하지 않은 만년필이 가방 안에 있었다.

 

사실은 시계나 반지 같은 액세서리를 주고 싶었다. 온종일 츠키시마의 신체 한 부분에 붙어있고 싶은 욕망이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그런 물건을 주고받을 사이가 아니므로 제외했다. 만나서 노는 친구 정도는 되지만 그 이상의 관계는 아니다. 자신이 일방적으로 귀여워하고 연애적인 의미로 조금씩 끌리고 있긴 하지만 딱 그 정도. 지나치게 좋은 걸 주면 그건 그거대로 이상하게 볼 것 같아서 고민한 결과, 중저가대이지만 쓰기 편한 만년필로 정했다. 필기구라면 학생이랑 신분에 무난하고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손에 쥘 일이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거짓말을 해야 하는 탓인지 긴장이 되었다. 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하고 싶어서 밥을 먹기 전에 건네기로 했다. 점원에게 메뉴를 말하고 기다리는 동안, 학과 행사 기념품으로 받은 건데 안 쓸 것 같아서 주는 거라는 그럴듯한 구실과 함께 만년필을 내놓았다. 자신에게 건네진 물체를 받아든 츠키시마는 단박에 브랜드를 알아차렸다. 제법 비싸고 좋은 물건이라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는걸, 자신과 만년필이 어울릴 것 같냐는 우스갯소리까지 해가면서 들이밀었다.

 

짙은 회색 바탕에 뚜껑의 클립 부분만 검은, 심플하고 차분한 디자인의 만년필을 훑어보던 츠키시마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재미있네요.”

“뭐가?”

“K라는 각인이 있어서요. 쿠로오씨는 성姓에, 저는 이름에 K가 있잖아요.”

“아- 그래.”

 

괜히 핸드폰 메신저 화면을 열어 확인하는 척을 했다.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간이 저만치 바닥으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심장이 혼자 방망이질치다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수백 번도 더 고민하다 결국 작게 새긴 각인을 한 번에 알아볼 줄은 몰랐다. 츠키시마의 말 그대로여서 간파당한 기분이었다. 설마 들켰을까 긴장하는 것도 잠시, 츠키시마는 태연하게 가방 안에 있던 노트에 원과 이름 몇 번을 써보더니 확실히 필기감이 좋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맘에 든 모양이었다. 타이밍 좋게 점원이 테이블 위에 접시를 놓기 시작했다. 그냥 우연히 알아챈 것 같았다. 거기에 담긴 의미 같은 건 전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귓가의 열도 다행히 내려갔다. 안심하면서도 왜인지 섭섭했다.

 

 

* * *

 

 

아닌 척 준비한 선물도 줬고, 밥도 다 먹었으니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었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다 길가에 나온 카페 겸 펍의 선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다가 갑자기 전에 가려고 따로 체크 해 뒀던 곳인 게 기억났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츠키시마지만 웬일로 깔루아밀크라는 칵테일 이야길 꺼내서 한 번쯤 같이 가자고 권유하려던 곳이었다. 무심코 뱉은, 여기 깔루아밀크가 맛있다는 말에, 역으로 향하던 발 네 개는 아직 아무도 없는 가게로 방향을 바꿨다. 혼자서 여유롭게 생일을 보내고 싶다고 한 게 어디의 누구셨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주량이 세다는 말의 뜻이 꼭 술을 좋아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좋아하거나 선호하는 술이 없으니 칵테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고, 죄다 영어로 된 이름에 자신이 혼자서 메뉴판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츠키시마는 기세 좋게 깔루아밀크를 주문했다. 바텐더는 바쁘게 손을 움직이면서도, 주문이 늦어지는 자신에게 논알콜과 소프트드링크도 있으니 느긋하게 고르라고 배려해주는 걸 잊지 않았다. 그래스호퍼라는, 특이한 이름의 논알콜 칵테일 한잔을 비우는 동안 츠키시마는 다양하고도 낯선 이름의 칵테일을 척척 주문해 마셨다. 감귤 색의 칵테일과 과일이 올라간 푸른 바다색의 칵테일까지 다 비우는 걸 보고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평소의 뚱하고 말 붙이기 어려운 얼굴이 취해서 조금 풀어져 있었다. 이야길 나누던 바텐더가 딸기가 올라간 칵테일을 만들어 내어주자 츠키시마가 활짝 웃었다. 딸기 좋아하거든요-하고 헤실거리는 게 귀여웠지만 이만큼 취한 건 처음이라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칵테일을 한 모금씩 삼키는 걸 지켜보는데 바텐더가 다가왔다. 점원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기분 좋게 취했을 때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작게 속삭였다.

 

계산을 끝내고 나왔을 때 츠키시마는 무릎을 안은 채 바닥에 앉아있었다.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앞에 서니, 하늘을 보고 있던 츠키시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취기가 돈 눈에 좀 말릴 걸 하고 후회했다. 비뚤어진 안경테와, 발개진 볼과 기분이 좋은지 올라간 입꼬리를 봤다. 이런 모습은 처음 봐서 당황스럽지만 신선했다. 일으켜주려고 하자 츠키시마는 무릎을 펴 꼿꼿하게 섰다. 대부분 타인을 내려다보는 일상이어서, 시선대가 맞는 사람은 흔치 않다. 지금 앞에 선 츠키시마가 그런 사람이었다.

 

“괜찮아?”

“뭐어……. 그런대로.”

“안 되겠다, 집에 데려다줄게.”

“혼자 갈 수 있는데-”

 

이제 스무 살이라서 어른이구. 평소와는 다른 말투와 살짝 뭉개지는 발음에, 좋아할 일이 아닌데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취하면 넌 이런 애가 되는구나. 처음 알았어.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고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바닥에 앉아 먼지가 붙은 부분을 탁탁 털어내고, 안경을 똑바로 선 채 걷기 시작했다.

 

“F역이던가?”

“그냥 걸어요.”

 

먼저 앞서가는 츠키시마를 뒤쫓아 나란히 보폭을 맞췄다. 사람들을 피해 넘쳐나는 불빛 사이를 헤치듯 걸어 나갔다. 어지럽거나 토할 것 같지는 않냐며 물었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만큼 마신 건 처음인데 꽤 기분 좋네요. 휘청거리지 않는, 오히려 평소보다 활기차 보이는 발걸음이었다. 기분 좋게 취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가야 할 지하철역을 지나치고 나란히 걸었다.

 

“집까지 꽤 멀지 않아?”

“가는 동안 술 깨고 집에서 또 마셔야죠.”

“혼자서 조용히 보내고 싶다며?”

“내년은 그렇게 보낼 거예요. 오늘은 쿠로오씨랑 보내야지.”

 

별 의미 없이 한 말이겠지만 듣기가 좋았다. 그래서 무심코 진심이 흘러나왔다.

 

“생일 축하해.”

 

남자들끼리 나누기에는 낯뜨거운 말이긴 했지만, 표현하고 나니 후련했다. 종종 장난으로 하는 간지러운 말에 평소라면 질색했을 츠키시마였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앞을 보고 있던 고개를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몽롱한 눈과 마주치자 괜히 쑥스러워져서 혼자 헛기침을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츠키시마는 코끝을 손등으로 훔치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꽤 긴 시간 동안 시선을 맞춘 해 천천히 걸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전부 다 일렁이는 환상처럼, 있는데도 없는 것 같았다. 좋아한다고 눈으로 말한다. 눈으로만 말한다. 전해지지는 않을 것이고 그걸 바라지도 않았다. …지금에, 만족해야 했다.

 

“…아. 알았다!”

“뭐, 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츠키시마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뭘 알았다는 걸까. 순간 자신이 무심코 좋아한다는 말을 꺼냈나 등골이 오싹해졌다.

 

“본인 생일도 그렇게 챙겨줬으면 하니까 이러는 거죠?”

 

역시 대가 없는 친절은 없어. 츠키시마가 너무하다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그렇지 하고, 들킬 리가 없는데도 괜히 놀래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도의 한숨을 뱉고는 물었다.

 

“내 생일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말 한 적이 없으니, 알 리가 없었다. 츠키시마는 코트에 손을 넣고는 내 쪽을 지긋이 보다가 또 웃었다. 술의 위력이 너무 셌다. 지금이 반, 1/4만큼이라도 좋으니 평소에도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 역시 취했을 때 자신의 앞에서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충분히 인기가 많은데 더 많아지면 곤란했다. 츠키시마에게 생일을 알려주면 어떠려나, 하고 상상하고 있는데 들은 걸 의심하게 만드는 답이 나왔다.

 

“11월이잖아요?”

“…어, 어떻게…….”

 

어떻게 아냐고 황급히 되물었지만 츠키시마는 그냥 웃고만 있었다. 대신 집에 사둔 와인이 있으니 얼른 가자고 재촉했다. 도대체 왜 알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지만 츠키시마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걸은 탓에 술이 깬 것 같으니, 좀 있다 취하게 만들어서 살살 캐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더는 묻지 않았다. 스무 살 무렵의 자신은 와인은 어른이 마시는 술로 생각했기 때문에, 즐기는 방법은커녕 코르크 마개를 여는 방법도 몰랐었다. 문득 생각이 나 와인 따는 법을 아냐고 물으니 잠시 말이 없다가 도리어 딸 줄 알죠? 하고 당연한 것처럼 물어왔다. 물론 딸 줄 알았지만, 말투도 이 상황도 너무 귀엽고 웃겨서 실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모르면서 산 거야?”

“쿠로오씨가 딸 줄 아니까 됐죠. 뭐.”

 

그 말 그대로였다. 나라도 딸 줄 아니 다행인 일이었다. 제법 쌀쌀한 공기에 곧 겨울이네, 시험이네 그런 이야길 하며 츠키시마의 집으로 향했다. 좋아하는 애의 생일에 단둘이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도를 지나칠 정도로 많은 걸 받은 느낌이었다. 츠키시마의 부모님에게 감사하고, 오늘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이렇게까지 취한 걸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인 것에 감사하고, 무척이나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종교가 있진 않지만, 세상의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는 가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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