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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low

By. 질리언

평소보다 10분 정도 일찍 끝났지만, 그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시기가 바로 개강을 한 지 얼마 안 된 요즘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직 다른 강의가 끝나지 않았기에 조용히 건물을 나가는 학생들의 발걸음에는 소리 없는 여유가 담겨있었다.

 

그러나 츠키시마가 향한 곳은, 도서관과 이어진 연결 통로였다. 그날 받은 과제는 제출이 급한 다른 과제가 있지 않은 이상, 당일 혹은 다음날에 끝내는 게 그만의 원칙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성실하다는 칭찬을 받을 만한 부분이었지만, 막상 본인에게 궁극적인 이유란 휴식 공간에서 할 일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에 가까웠다.

 

평소에도 책을 가까이하는 이에게 그 어떠한 곳보다 즐거움을 주는 공간, 도서관은 평소보다 사람이 적었다. 주말을 앞둔 평일인 데다가 대부분의 강의가 끝났을 시간 덕분이었다. 차분한 백색소음의 효과는 듣는 사람도 차분하게 만드는 점이라 생각하는 츠키시마다. 그러한 마음에서 시작하는 의욕은 필요 이상으로 어깨에 힘을 싣게 하지 않는다. 의욕이라는 것은 참으로 제멋대로이어서, 똑같은 할 일이라도 단숨에 해치워버릴 때도 있으면서 때로는 한없이 미루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남들보다 감정 기복이 쉽게 드러나는 편은 아닌 그였지만 차라리 그럴 바에야 온전한 휴식을 보상으로 바꾸는 편이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를 실천 하는 방법이 바로 밖을 나선 순간부터 목표한 할 일을 끝내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넓은 책상을 혼자서 차지한 덕에 평소와 달리 가져온 서적을 활짝 펼쳐놓을 수 있었다. 살짝 내려온 안경테를 올리고서 필요한 부분을 빠르게 읽는다. 노트에서 필요한 부분을 옮겨 적거나 강의에서 배운 필기를 찾기 위해 뒤적거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노트북의 자판 위로 길고 얇은 손가락들이 올라왔다. 츠키시마는 새하얀 창에 깜빡이는 커서를 가늘게 뜬 채 바라보았다.

 

‘와인의 맛을 정리하는 단어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

 

오늘 강의에서 들었던 교수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단지 와인의 맛을 묘사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코르크 마개를 따기 전까지 알 수 없는 미지의 맛을 고르기 위한 지표가 되어준다는 단어들. 이번 과제는 와인의 테이스팅 단어를 찾고 그 단어가 어울리는 와인의 숙성 방법을 정리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교수는 맛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같은 와인이라도 붙인 사람에 따라 다른 단어를 쓸 수 있다면서 자유롭게 찾아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정보는 어느 정도 찾았으니, 다음 단계는 깔끔하게 다듬은 문장으로 보고서를 채울 차례였다. 뭐, 바라만 본다고 문장이 쓰여지는 건 아니니까. 솔직히 지금 시대면 생각만 해도 컴퓨터에 입력되는 기계가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실없는 생각에 츠키시마는 저 자신에게 어이없어하면서도 이내 문장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한참 집중했던 덕분인지, 단숨에 제출 분량을 채웠다. 조금 더 다듬고, 출발하면 시간은 딱 맞을 것 같네. 다시 한번 쓴 문장들을 읽으면서 그는 생각했다. 집에 가면 하기 싫어지니까 아예 마무리까지 하고 갈까.

 

‘…기숙사에서 있었을 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입학하고서 줄곧 지내던 기숙사에서 츠키시마가 나온 것은 2학년인 올해, 그것도 하반기가 시작된 이후였다. 이렇게 주거지가 중간에 바뀌게 된 이유이자, 그가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확실하게 과제를 끝내고 싶어 하는 이유.

 

그리고 무엇보다 남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개강을 오히려 설레면서 다닐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연인과의 동거’ 때문이었다.

 

츠키시마가 유일하게 듣는 교양 수업이자 금요일 오후 강의명은 ‘술의 세계와 주도’였다. 학생들에게 와인 강의라고 불리는 강의는 그의 연인이자 같은 대학 선배인 쿠로오가 들었던 강의였다. 추천을 받으면서 자신에게 와인에 대한 지식을 말해주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자 같이 듣지 못해 아쉬워하는 연인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같이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저희는 여전했을지도 모르는데도요?’

 

츠키시마의 말에 쿠로오는 그건 절대 안 된다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좋아하면서도 그저 자신만의 짝사랑이라며 선을 만들어놓고 넘어가지 못했을 때의 그들은 서로가 있어서 설렜고 동시에 힘들어했다. 사실 한 발짝만 떨어져서 보아도 상대가 나를 얼마만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을 테지만, 그 당시에는 숨겨야 하는 마음이라 성급하게 내린 결론이 족쇄가 되어 그들의 발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질 인연은 어떻게든 이어진다 해서 인연이라는 말처럼, 츠키시마와 쿠로오는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딱 한 뼘의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했다. 기존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몸이 멀어지면 해결될 거라는 같은 결론을 내렸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일상에서 점점 커지는 서로의 공백이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은 거리를 단숨에 가까워지는 순풍의 역할을 해주었다.

 

『Charm/Charming』

 

옅은 금색의 눈동자가 자신이 선택한 단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직접적인 느낌이 많지만 그다지 복합적이지 않은 나중에 더 많은 것을 가질 수도 있는 와인에 종종 사용하는 표현으로, 기대되는 와인, 한 번 더 마시고 싶은 와인이란 뜻으로 쓰이는 단어.

 

그리고 츠키시마 케이가 생각하는, 제 연인에게 어울리는 단어이기도 했다. 쿠로오 테츠로는 알면 알수록 그에 매력에서 한없이 빠져들고 싶은, 동시에 앞으로의 매력이 궁금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런 게 연애가 주는 색안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사람에게는 그 누구보다 큰 애정을 품고 있는 츠키시마였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도서관을 빠져나간다. 어느덧 하늘에는 붉은빛을 삼킨 어둠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서늘해지는 바람에 마찬가지로 이르게 모습을 보이는 달빛을 닮은 머리칼이 흔들린다. 이제는 두 사람분의 물건으로 가득한 집에서 오늘도 수고스런 하루를 보낸 그들은 즐거운 저녁 식사를 보낼 시간.

 

오늘, 우유는 세탁소 옆 마트에서 사자고 할까. 츠키시마는 횡단보도 앞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제 옆에 서 있는 자전거 바구니 속 우유를 보면서 생각했다. 오전 강의를 위해 나갔던 길에 나눠주었던 슈퍼마켓의 전단지가 그대로 가방 안에 들어있었다.

 

‘마트에서 나눠주는 전단지, 꼼꼼하게 챙겨보면 좋은 게 많다고? 식비도 아낄 수 있고.’

‘흐음, 안 사면 더 아낄 수 있을 텐데요.’

‘딸기가 세일인데?’

‘…꼼꼼한 쿠로오상이 최고라고 말했던가요.’

 

그렇게 말하자 전단지 위로 크게 동그라미를 그리고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환하게 웃어준 연인의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다. 두 사람은 그런 순간을 ‘일상’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신호등의 색이 바뀌고 멈춰 있던 사람들이 움직인다. 이제는 완전히 해가 진 하늘에는 이른 별이 떠 있었다. 지하철 출구가 있는 사거리의 신호등이 몇 번을 바뀌었을 때, 기다리던 이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렇게 뛰어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츠키시마는 알 수 없었다. 자신 역시 기다리는 연인에게 갈 때면 자신도 모르게 뛰게 된다는 것을.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아뇨, 저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최대한 빨리 오려고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전철이 연착되어서. 문장을 만드는 목소리에 듬뿍 묻어나오는 애정이 보고 싶다는 숨겨진 뜻을 전해준다.

 

그렇기에 츠키시마는 생각하곤 했다. 당신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나도 보고 싶어진다는 걸. 그리고 그게 반했다는 증거라면.

 

‘난 매일 그 사람에게 반하고 싶어진다는 거겠지.’

 

“츠키시마?”

 

쿠로오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어린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츠키시마는 생각했다. 물론 남들보다 높지만 비슷한 눈높이 덕에 쉽게 눈을 맞출 수 있고, 언제나 듣기 좋은 목소리로 지금처럼 제 이름을 부르는 연인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겠지만.

 

‘말해주기엔 쿠로오상이 너무 좋으니까.’

 

“같이 갈까요.”

 

그렇게 말하는 츠키시마는 제 사람에게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살짝 걸었다. 그리고 그보다 커다란 손의 주인은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렇지만 상냥하게 잡으며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응, 같이 갈게.”

 

오늘 먹고 싶은 거 있어? 글쎄요, 마트에서 세일하는 거 보고요. 다시 한번 바뀐 신호를 따라 건너왔던 횡단보도를 건너는 그림자는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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